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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육의 필요성과 대안》


장동민 (백석대학교회 담임목사)



우리나라 공교육이 위기를 맞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공교육의 위기에 대하여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미 정부는 90년대 초 5.30 교육개혁 이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 맞는 경쟁력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교조」에서는 오래 전부터 입시 위주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올바른 인성 교육을 위한 방안을 내놓았다. 또한 지난 10년 간 소위 ‘대안학교’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오고 있으며 그 전망 또한 밝다. 기독교인 가운데도 기독교적 대안학교 운동이나 홈스쿨링 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많이 있다. 이제 우리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기독교적 대안을 논의하기에 앞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립학교 교육의 대안을 짚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학교 운동의 당위성을 재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가진 허점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타산지석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 가지의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우선 형식면에서는, 현재 진행되는 세속 교육의 새로운 방향은 두 가지이다.

① 첫째 방향은 공교육의 강화이다. 교과 내용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개편하고, 교사 당 학생의 비율을 낮추며, 최첨단 교육 설비를 위하여 투자하고, 교사의 자율권을 신장하자는 등의 개혁안이다.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교육의 기회를 준다는 대전제에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율성에 대하여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사회의 각 영역에서 민간 주도의 폭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데, 가장 사적(私的)인 영역에 속하는 교육을 다시 국가가 주도한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학교보다 사설 학원이 교육 효과가 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② 둘째의 대안은 교육의 영역에서 민간 주도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다. 자립형 사립고, 특수 목적고, 대안학교, 홈스쿨링 운동이 모두 이에 속하는 것이겠다. 시대의 흐름에도 맞고 효율성 면에서도 이미 검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가진 사람이 더 좋은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평준화 제도하에서도 학력의 차이가 심각한데 평준화마저 폐지된다면, 또한 외국의 학교까지 들어와서 무한 경쟁의 시대가 된다면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 갈까는 자명하다. 유럽의 선진국과 같이 학력에 따른 임금의 차별이나 사회적 신분 의식이 없는 나라에서는 좋은 제도일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는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있다. 항간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대치할 수 있는 사회 철학인가 아니면 모더니즘의 기생물(寄生物)에 불과한가 하는 문제와 맥을 같이 한다. 공교육을 강조하는 분들은 모더니즘의 과제인 ‘보편성’과 ‘평등’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대안 교육을 주장하는 분들은 모더니즘의 교육 목표는 수명을 다하였으므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합당한 교육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딜레마라 아니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 교육 운동이 큰 의의를 가진다. 그것이 기독교대안학교 운동이든 기독교적 홈스쿨링 운동이든 아니면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에의 (소극적인) 참여이든 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교육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빈부차이를 더 심화시킬 정도로 부자들을 위한 교육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기독교적 인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을 길러 내기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이 점은 우리나라 기독교 사립학교의 역사를 보아서도 분명해 진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선교사와 민족의 선각자가 합작하여 만든 미션스쿨은 처음부터 자신들만의 소규모 공동체를 마련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엘리트를 위한 교육이었던 것도 아니다. 교회가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명 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며, 그 대상은 소외된 어린이들이었다. 일제가 세운 관립학교들과 이를 계승한 공립학교가 공교육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와 동시에 기독교 학교도 공교육의 주류를 이탈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에 와서 미션스쿨이 그 교육의 내용에서 독특성을 잃어버렸다는 비난을 듣지만, 이를 설립하고 운영한 분들의 마음속에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점은 높이 살만 하다. ‘보편성’과 ‘평등’이라는 성경적 가치를 저버리지 않았으면서도, 강한 드라이브를 가진 민간주도의 형태를 지향하였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교육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지금은 기독교 교육을 시작해야 할 시기이다.

흔히들 근대적 교육은 산업화와 국민 국가가 형성되면서, 직업 교육과 공민 교육을 담당할 기관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말한다.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서양의 경우 실제로 초ㆍ중등 교육기관을 운영하던 곳은 바로 교회나 선교단체였다는 사실이다. 설사 국가가 운영했다 하더라도 대부분 서구 국가의 국교인 기독교가 그 교육 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즉 근대적 거대 담론과 과학적 사고의 밑바탕에 기독교가 있었다. 학문과 교육에서의 세속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미국의 경우 1960년대 말에 와서이다. 이 때 비로소 교실 벽에 붙어 있던 십계명을 떼어냈고, 주기도문과 수업 전 기도를 폐지하였다. 공교육은 ‘가치중립적’인 과학과 국민으로서 알아야 할 윤리를 가르친다고 스스로를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치중립적인 것은 없다. 공립학교의 기초에는 다원주의가 자리 잡고 있고, 결국 쇼비니즘화(化)한 국가주의와 물신숭배로 끝이 나고 만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의 가치는 ‘입신양명’의 수단이었고, 이는 다시 입시 지옥과 교실 붕괴, 그리고 공동체 의식의 상실로 끝을 맺었다.
대안 교육을 주창한 분들은, 정신적 공허를 만회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유사 종교적인 기반 위에 교육 철학을 세운다. 각종 동양 종교적인 배경에서부터 생태학(에콜로지) 혹은 민족주의 등이 그 근저를 이룬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거 모더니즘의 거대 담론으로 돌아가서 학생들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근대 과학과 윤리의 보편성을 부인하고 다원주의에 기초한 평화를 가르친다. 아직은 이들의 세력이 미미하며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에 순기능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이 교육을 지속한다면, 보편적 지식을 부인함으로 학력이 저하될 것이다. 또한 윤리적으로 특별히 성(性) 윤리에서는 상당히 개방적이 될 것이다.
여기에 또한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이 있다. 기독교교육에서는 과학과 윤리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삶과 사고의 통전(統全)적인 체계를 지향한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이시고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물론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극우 보수주의 윤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정신과 끊임없이 대화함으로 그들의 강조점을 기독교적인 체계 속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 기독교적 사고의 전통이다.



기독교가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다. 학생들을 전도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기독교적인 교육만이 국가 교육을 정상화하고, 학생에게 진정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는 말이다. 혹시 어떤 분은 교회는 주일학교나 잘 운영하면 되지 공립학교 교육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육에서 중립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교육 아니면 하나님에 적대적인 교육만이 있을 뿐이다. 주일에는 창조론을 배우고 주중에는 진화론을 배우는 정신분열적인 교육에 대하여 잠잠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닌가? 또한 교회 내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그 영역 가운데 하나가 교육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기독교 교육이라는 것이 주일학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주일학교와 일반 교육은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를 맺어야 하며 기독교인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육에 참여하여야 한다. 교육적 참여에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가정이고, 교회와 학교교육에까지 확장된다. 이제 하나하나 그 현실을 살펴본다.

(1) 가정에서의 기독교교육

성경말씀에 따르면 자녀 교육(그것이 종교적 교육이든 직업 교육이든)에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은 부모이다.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6:6-7상)라고 부모에게 직접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가정이 이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기도를 가르치고 함께 가정예배를 드려야 하는 의무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근대적 초중등교육은 국민국가가 태동하면서 국가적 인재를 키워야 하는 필요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 헌법도 국가가 교육을 담당할 책임과 권리를 명시하고, 모든 국민은 교육의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교육의 형식과 내용을 국가가 관리한다. 그 비효율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교육의 내용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부모가 전혀 알지도 못한다. 교육의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하는 생각으로 국가의 관리를 믿는 것이다. 정치나 경제와 같은 영역에서는 과잉참여를 하면서 교육에 대하여는 과도하게 너그럽다. 사실은 종교교육에 대하여도 그 일차적 책임은 교회가 아니라 부모이다. 교회는 부모를 격려하여 자녀를 기독교적으로 양육하도록 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교회에 자녀를 맡겨 놓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학과교육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종교교육은 교회가, 품성교육은 가정이 담당한다고 하는 역할분담이 자연스런 현상이 되었다. 물론 전문가의 사회가 되었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는 세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세 교육 담당자가 동일한 철학과 동일한 사상을 기반으로 역할을 분담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으나, 서로 상반되는 기반 위에서 아이를 가르친다면 분열적인 인격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를 믿는 부모들은 그 최고의 관심이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임을 신앙으로 고백한다고 하면, 그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 제자의 삶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이라고 하면 자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자녀들의 학과 교육과 영적인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도 21세기를 맞아 기독교적으로 자녀를 양육시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치고 격려하는 설교와 특강 등이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일학교를 책임 맡은 분들도 자녀 양육의 일차적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부모와의 연결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2) 교회에서의 기독교교육

부모들의 연합체인 교회가 그들의 자녀를 위탁받아 가르칠 수도 있고 또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다. 주일학교가 어린이의 신앙교육을 담당해 온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다음 세대를 이끌고 가야 할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 점에서 매우 취약하다.
우선 숫자적으로 우리 주일학교의 모습을 보자. 초대형교회에서의 어른과 초중고등학생의 비율은 10:1을 밑돈다. 초대형교회의 심각한 약점 중의 하나이다. 중형교회라 할지라도 영아부에서 청년부까지의 숫자가 어른 교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이 추세이다. 출산율의 하락이 원인으로 지적될 수도 있으나 그것만은 아닌 듯싶다. 교회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현저히 낮아진 것이다. 학교교육과 사교육의 중요성에 밀려 주일도 종교교육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교회가 재원을 많이 요하는 건축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상대적으로 헌금하지 못하는 3-40대의 젊은 층을 등한시한 결과가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어쨌든 이대로 나간다면 20년 후의 한국교회는 그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 자명하다.
또한 주일학교 교육의 내용은 어떠한가? 교육의 이념과 비전 수립, 체계적인 교육과정, 전문화된 주일학교 교사 훈련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선진화된 교수법을 알지 못하고 과거의 방법에 얽매어 있다. 유치부에서 초등부의 경우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출석할 뿐이고, 질 좋은 간식과 상품이 이들을 즐겁게 한다. 중고등부와 청년부의 경우 체계적인 성경교육 보다는 찬양과 경배 등의 회심 중심의 프로그램으로 감정의 풍성함만을 강조한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불신 청년들 사이에 안티기독교적 성향이 만연해 있는데 이들과 대결하여 기독교를 변증하고 기독교적 영향력을 파급시키는 내용은 거의 전무한 것 같다. 자칫 교회의 청소년이 자신을 세계로부터 고립시켜 자기들만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지 않을까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제는 주일학교 교육이 그 체제에서, 또한 교육의 내용에서 중대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우선 주일학교는 교회의 중심에 들어와야 한다. 국가가 인적자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부총리를 필두로 하여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듯이, 부모가 아이들 대학 보내기 위하여 파출부 노릇하며 과외비 마련하듯이, 교회도 그러해야 한다. 어떤 집단에서든지 교육은 이익을 창출하는 기관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다른 곳에서 창출한 이익을 쏟아 붓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내용에 대하여도 복음의 내용을 반복하고 회심을 강요하는 것으로부터 선회하여야 한다. 복음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들이 세상과 직면하여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충실한 일군을 만드는 것에 만족하기 말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우리 주일학교 교육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특히 2008년부터는 주5일근무제가 전반적으로 실시됨으로 토요일에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는 자녀와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으나 상당수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방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삼아 교회에서 기독교적 교육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3) 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

학교 제도가 이미 우리 사회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학교 교육을 제외해 놓고 교육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교육에 어떤 기여를 하고 싶다면 가정과 교회와 더불어 학교에서 주도하는 학과 교육에 대하여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학교교육에서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교육에서 오랫동안 고수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독교인들이 지레 학교에 대하여는 일정한 선을 긋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미션계 사립학교들은 그 원래의 사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전파를 사명으로 건학하였다면 복음전파를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단 강의석씨 사건 이후 학교에서 채플이나 성경공부를 통한 복음전파가 점차로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에서, 직접적인 복음전파가 아닌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채플을 문화적으로 접근한다든지 아니면 각 학과의 기독교적 해석을 가르친다든지 하는 방식을 택하여야 할 것이다.
공립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도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교과외 활동을 통하여 학생에게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고, 혹은 교과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적인 교사 연합체에 가입하여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적 영향력을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독교인 교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또 한 가지 학교교육과 관계해서 진정한 기독교적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대안교육운동이나 홈스쿨링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력이 있는 교회에서는 기독교학교를 설립하여 그리스도의 제자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단 이것이 또 하나의 엘리트 교육기관이 되지 않고 기독교세계관에 기초한 교육이 시행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에서 출발하고, 교회의 위기는 기독교교육의 위기로부터 시작한다. 교회가 한국사회의 등불이고, 지금의 어린 제자들이 미래 기독교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이 몸으로 체험하였던 기독교가 첨차 쇠퇴하여,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삿2:10)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이 시대의 징조를 바라보며 이 시대에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최우선이 무엇인지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