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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진검승부(眞劍勝負)


장동민목사



    선교의 역사는 곧 정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세기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후 로마제국이 팽창하면서 주변국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피정복민을 강제로 개종시켰다. 15세기 대(大)항해시대 이후 서구 기독교사회가 미국 대륙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식민화하는 과정이 곧 선교의 역사와 일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히 이슬람 세계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이슬람도 기독교와 같은 방식으로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쿠란을 들고 피정복민을 개종시켰다. 흔히 ‘선교’를 ‘군사적 정복’(conquest)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정의하곤 한다. 물론 사회를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친다는 의미의 정복이지만, 이 은유를 사용하는 선교사의 의식 속에는 제국주의가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후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군사적, 정치적 의미의 식민지 개념은 사라졌지만, 선교에는 아직도 이러한 방식의 선교의 잔재가 남아 있다. ‘선교’라 할 때는 일반적으로 국력이 강한 나라에서 약한 나라로, 문화적으로 우월한 나라에서 개발도상국으로의 선교를 의미한다. 만일 어떤 선교사가 케냐로 선교하러 간다면 어려운 길 고생하러 간다고 할 것이고, 영국으로 선교하러 간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케냐가 기독교 인구 80퍼센트에 육박하는(가톨릭 포함)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이고, 영국의 기독교 인구가 5% 미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선교를 살펴보자.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미개한 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수도 빌립보, 제2의 도시 데살로니가, 헬레니즘 문명의 수도 아테네, 로마제국 제3의 대도시 고린도, 소아시아의 중심지 에베소, 그리고 마침내 로마 등, 그가 갈 수 있는 한 최고로 번성하고 문명이 발달한 도시들로 갔다. 단지 복음전도의 효율성이나 전략적 위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곳들을 복음으로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외관상 화려한 그 도시 권력자들의 가면을 벗겨내고 민낯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그 문명에 압살되어가는 낮은 자들을 돌보는 것을 통하여 잘 보여주었다.
    전통적인(혹은 통속적인) 선교의 개념이 얼마나 성경에서 멀어져 있는가! 사도바울이 가진 것은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아무런 문명의 도움이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자부심은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조소와 박해의 대상이었다. 그나마 바울이 내세울만한 것은 그의 학문 즉 수사학적 능력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아예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능력과 그 복음으로 변화된 자신의 인격으로 로마제국의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지금 우리는 다시 세상과의 진검승부 한 판을 벌여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선교지에 교회 건물을 지어주면 사람들이 모이는 때는 지났다. 복음이 아닌 문명을 전해 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가 드러났다. 현실적으로도 한국교회의 물질적인 역량이 점차 약화되고 선교사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선교비 지원도 점차 어려워진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성령의 능력보다 문명과 물질을 의지하는 선교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소수이지만 성경의 방법으로 선교하는 사람들만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
    국내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세상의 문명보다 앞섰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 때를 그리워하면서 교회 문명의 재도약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보다는 교회에서밖에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것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바로 복음과 복음의 능력, 그리고 복음으로 변화된 인격 말이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 선교이다.